藤原行成(ふじわらのゆきなり/こうぜい)(972~1028), 후지와라노 유키나리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글을 씁니다. 작품이나 시를 경유하지 않고 인물을 단독으로 소개하는건 처음이네요..?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보면서. 블로그 글을 쓰면서 그간 미친듯이 언급을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검색해보니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는 않네요? 한국어로 검색하면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일본어로 검색하면 그래도 조금 더 많긴 한데... 사실 이 글은 11년 전부터 시작했으며... 일단 그 때에도 쓰겠다는 생각은 있었는데 그대로 비공개 저장만 해둔 탓에, 11년이 지난 지금 처음부터 새로 쓰고 있답니다. 그렇지만 괜찮아요. 지금이 더 잘 쓸 수 있으니까!
후지와라노 유키나리는 972년, 백인일수 50번의 가인인 藤原義孝 후지와라노 요시타카의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섭정으로 권력을 잡고 있던 조부 藤原伊尹 후지와라노 코레타다도, 뛰어난 가인으로 유명했던 아버지 요시타카도, 유키나리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가세가 기울어, 유키나리는 외조부인 源保光 미나모토노 야스미츠의 양자로 자라나게 됩니다. 외조부 미나모토노 야스미츠는 뛰어난 학자였던 동시에 태정관의 중핵이었던 弁官(べんかん)을 역임하고 蔵人頭(くろうどのとう) 직도 맡아 한자에 조예가 깊고 내외정 양쪽에 정통했던 덕분에, 아마 이러한 경력과 지식이 유키나리에게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측됩니다.
꽤 유력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앞에서 말한 상황들로 인해 그의 청년기는 불우했습니다. 13세 나이에 종5위하 관직에 추천 되었으나 뒷배가 없어 잘 풀리지 않았죠. 995년 24세의 나이로 드디어 蔵人頭(くろうどのとう) 직에 발탁되며 관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후로는 이치조 천황과 히가시산조인센시,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등으로부터 신임을 얻어 최종적으로는 権大納言(ごんだいなごん) 곤다이나곤 직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大納言 다이나곤'이란 당대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의 차관직인데, 앞에 権을 붙이면, 기존의 정원이 아닌, 정원외로 지명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특히나 이치조 천황 대에 활약했던 네 명의 중요 간부를 四納言(しなごん) 시나곤이라고 하는데, 이 중 한명이 유키나리입니다. 이 넷은 源俊賢 미나모토노 토시타카, 藤原公任 후지와라노 킨토, 藤原斉信 후지와라노 타다노부, 그리고 후지와라노 유키나리인데, 이 중 후지와라노 타다노부가 다이나곤 직에, 나머지 셋이 곤다이나곤 직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습니다.
사실 이 네 명은, 섭관 정치의 중심에 있었던 藤原道長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정권을 유지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유키나리는 이 중에서도, 천황과 가장 가까운 측근임과 동시에 미치나가의 뜻을 천황에게 전달하는 역할 등도 했다고 합니다.
위와 같은 에피소드가 후지와라노 유키나리 본인의 일기인 権記(ごんき) 권기에 적혀 있습니다. 권기의 명칭 또한 유키나리의 최종 관직이었던 権大納言 에서 유래합니다. 이 일기는 현재 991년부터 1011년까지의 내용과 1026년의 내용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특히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권력이 가장 전성기에 달했던 때인 동시에 蔵人頭(くろうどのとう)로써 재임하고 있던 시기라, 당대 정무 운영이나 권력의 중핵, 궁정 내부의 일들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입니다.
이렇듯, 정치가로써도 큰 역할을 수행한 유키나리였는데, 동시에 그는 서예에 무척이나 뛰어났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특히 당나라에서 전해진 서예 스타일과는 다른, 온화하고 우아한 서풍으로 일본풍의 서예를 완성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후세에 그는, 三蹟(さんせき) 세 명중 한 명으로 꼽히게 됩니다. 이는, 헤이안 중기에 활동했던 능서가(서예에 능한 사람) 세 명으로, 小野道風 오노노 미치카제, 藤原佐理 후지와라노 스케마사, 그리고 후지와라노 유키나리입니다.
히라가나 글씨가 아름다웠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현대까지 전해지는 유키나리의 친필로 확인 된 것은 모두 한자체 필적 뿐인 것이 무척이나 아쉬울 따름입니다...
유키나리가 10살이 되던 해인 982년에, 桃園邸에서 성인식을 치렀다고 합니다. 桃園邸 도원 저택은, 헤이안 쿄 대내리의 북쪽 교외, 이치조 북쪽, 오오미야의 서쪽에 있었던 땅으로 원래는 왕궁 소속의 과수원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후에 저택 부지가 되었고 清和天皇 세이와 천황의 아들 貞水親王 사다미즈 친왕이 이곳에 저택을 짓습니다. 이후 유키나리의 조부, 아버지를 거쳐 이 저택은 유키나리에게 상속 됩니다. 유키나리 말년에 이곳에 은거하며 저택 내에 世尊寺(せそんじ) 절을 건립했기 때문에, 이후 유키나리를 초대로 하는 世尊寺家 세손지 라는 가문명이 성립되게 됩니다.
아무튼, 저택은 그 이름에 걸맞게 복숭아 나무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 지역은, 지명(京都市立桃薗小学校, 현재는 폐교) 등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정작 터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런데 사실 유키나리는 성장한 이후 이곳에서 생활하지는 않았다고 해요. 어릴 적에 여기서 지내다가 이후에는 다른곳에서 생활했고, 말년에 다시 돌아와 절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世尊寺 세손지 가문은 특히, 유키나리 사후에 유키나리의 자손들이 능서가로 유명했던 그의 서풍을 받들어 대대로 서예에 능한 집안으로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만 1대 유키나리를 시작으로 해, 17대에서 그 명맥이 끊기게 되고 맙니다..
정치가로도 서예가로도 이름을 떨친 그는, 자신의 일기나 마쿠라노소시 등에 다양한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도 함께, 이 블로그를 통해서 차근차근 소개해 나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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