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安時代 헤이안 시대는 794년부터 1185년을 가리킵니다. 桓武天皇 간무 천황이 도읍을 平安京 헤이안 쿄 (현 교토부 교토시) 로 옮긴 해로부터 鎌倉幕府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된 시기까지의 약 390년 간을 가리킵니다.
통상적인 시대 구분에서는 고대의 말기에 위치하게 되지만, 중세의 발아기로도 볼 수 있어 고대로부터 중세로 이어지는 과도기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중립적인 개념으로 '중고 中古 시대' 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헤이안이 성립되던 시기, 중국에서는 수나라(581~618)와 당나라(618~907)가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가 끝나 통일 신라(668~935)와 발해(698~926)로 양분되어 있는 시기였죠.
헤이안 시대 초기는, 전대인 奈良時代 나라 시대(710~794)의 정치 체제나 문화를 계승해나갔습니다. 나라 시대의 전대인 飛鳥時代 아스카 시대(592~710)의 舒明天皇 조메이 천황이 630년, 당나라에 '遣唐使 견당사'를 처음으로 파견했습니다. 당나라로 학생이나 승려를 파견해 당나라의 선진적 기술과 정치제도, 화려한 문화, 불교 경전 등을 적극적으로 유입시키려고 했던 것이죠. 이는 나라 시대를 거쳐 헤이안 전기까지, 약 200년 이상 이어집니다. 물론, 한반도의 통일신라와의 교류도 무척이나 왕성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정치 및 문화의 기반은 당나라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아 만들어지게 됩니다.
헤이안 시대의 문화 또한 그러한 배경에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나라에서 교토 지역으로 도읍을 옮길 때에, 당나라의 낙양성과 장안성의 형태를 본따 건설한 곳이 바로 헤이안의 수도, 헤이안 쿄입니다. 平安이라는 명칭 또한 당나라의 수도 長安에서 본따 지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평화롭고 안온하기를 염원하는 바람이 담긴 명칭이었습니다.
동서와 남북으로 큰 도로를 배치한 후 작은 구획은 나누는 도시 계획인, 条坊制 조방제를 차용한 것이 특징적입니다. 이 조방제는 중국의 당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四神 사신과 방향을 연결짓는 음양도와 풍수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신라의 도읍 서라벌(경주)에서도 이를 채용했다고 합니다.
동쪽 | 청룡 | 물 | 파란색 | 봄 |
서쪽 | 백호 | 길 | 하얀색 | 가을 |
남쪽 | 주작 | 호수 | 붉은색 | 여름 |
북쪽 | 현무 | 언덕 | 검은색 | 겨울 |
남북 중앙에 주작대로를 배치하고, 남북을 가로지르는 대로(방)와 동서를 가로지르는 대로(조)로 바둑판처럼 각 구획을 나누었습니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주작대로, 그곳에서부터 황궁인 大内裏 대내리로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중앙의 커다란 문이 바로 '朱雀門 주작문'입니다.
오른쪽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대각선으로 뻗어 있는 길은 거의 없고 거의 모든 도로가 동서남북을 향해 직선으로 교차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재의 교토에도 남아 있어,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치 제도적 측면에서 헤이안 시대는 크게 전기(794~901), 중기(901~1068), 후기(1068~1185)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헤이안 이전, 아스카 시대 때에 수나라와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해 율령제 律令制 를 채택했습니다. 일본에서의 율령제는, 중국의 제도를 참고하면서도 독자적으로 자리잡았는데, 이는 중앙집권적 국가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의 율령제는 공지공민제 公地公民制 를 철저히 채택하고 있습니다. 토지, 사람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고 모두 공公, 즉 천황이 소유하고 지배하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높은 관직을 가진 신분이나 큰 절 등에 있어서는, 공적 업무의 범주로 여겨 따로 특례를 만들어 지정된 토지에서 수확된 것은 직접 수입으로 얻는 것 또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아직 완전한 관료제가 자리잡기 이전으로, 일부 씨족제 또한 함께 인정되고 있었습니다. 율령제로 각 지방까지 다스리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일까요.
헤이안 시대 전기에는 천황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이 율령제를 일정 부분 유지하면서 실효성을 위주로 재편성을 꾀합니다. 도읍을 헤이안으로 옮긴 것 또한, 구습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죠. 이는 실제로 천황의 권위 강화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들어, 200여년 간 이어져오던 견당사 제도를 폐지합니다. 894년, 현재에도 '학문의 신'으로 숭배되고 있는 菅原道真 스가와라노미치자네의 적극적 주도로 이뤄진 일이었습니다. 견당사는 당나라의 제도나 기술, 문화를 일본으로 가져오는 데에 무척이나 큰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필요한 것은 충분히 가져왔다고 여긴걸까요? 동시에, 당시 당나라의 국가 정세가 불안정 했던 이유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당나라는 907년을 끝으로 화려했던 문화의 막을 내리게 되죠.
이렇듯, 견당사가 폐지되면서 일본에서는 지금껏 있어왔던 당나라의 영향에서 벗어나, 일본의 풍토에 맞는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려고 합니다. 이를 国風文化 국풍 문화라고 합니다. 당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문화를 唐風 당풍 문화라고 부르던 것과 반대되는 의미를 담아, 国風 국풍, 혹은 和風, 倭風 등의 명칭으로 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풍 문화는 헤이안 중기에 크게 꽃피워 현재까지도 일본 문화에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헤이안 중기 시대는, 본격적으로 '섭관' 중심의 귀족 정치가 시작된 시대를 가리킵니다. 摂関 섭관이란 摂政 섭정과 関白 관백을 함께 일컫는 말입니다. 본래 섭정은 천황이 나이가 어려 정무를 돌보기 어려운 경우, 대신 정무를 돕는 역할을 말합니다. 천황이 나이가 들면 관백 자리로 물러나 정무에서 손을 떼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이 시대 귀족이었던 藤原氏(藤原北家) 후지와라씨 일족은 천황의 외척이라는 신분으로 섭정과 관백 자리를 독점하며 정치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들은 율령제에서 규정된 조정 내 최고 관직인 '太政大臣(だじょうだいじん) 태정대신'보다도 더욱 강한 권력을 자랑하며, 천황을 허수아비로 내세우고 내정을 자신들의 손에 쥐고 흔들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섭관 정치는 藤原道長 후지와라노미치나가 때에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치나가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기간에 일본 고전 문학의 걸작이 여럿 탄생합니다. 미치나가 스스로 적은 일기인 '御堂関白記(みどうかんぱくき) 미도관백기'는 당시의 정치나 귀족 생활에 관한 중요한 사료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섭관 가문에서는 딸을 천황과 혼인 시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에, 모순적이게도 여성들이 중요시 됩니다. 마침 히라가나와 가타카나의 표기법도 자리잡아, 일본어로 표기하는 것이 비교적 쉬워졌기 때문에 마쿠라노소시나 겐지모노가타리 등으로 대표되는 여류 귀족 문학이 번성하게 됩니다. 겐지모노가타리를 쓴 무라사키시키부가 바로, 미치나가의 딸인 彰子(しょうし)가 황후로 입궁 했을 때의 궁녀였죠.
이어진 헤이안 후기 시대는, 院政期(いんせいき) 원정기라고도 부릅니다. 귀족에게 집중된 권력을 다시 천황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원정' 제도를 적극적으로 펼치게 된 시기입니다. 이는 천황이 황위를 넘기고 스스로 상황이 된 후 출가해 '법황法皇(ほうおう)'이 되는데, 상황으로써 院(いん) 원으로 불리며 여전히 정무를 돌봤기 때문에 이렇게 부릅니다.
後三条天皇 고산조 천황이 즉위(1068년)했을 때, 비로소 외척을 후지와라씨로 갖지 않는 170년 만의 천황의 등장으로 본격적으로 후지와라 섭관 가문에 대한 저지가 시작됩니다.
11세기 후기까지 각 지방에서 직접 땅을 개간하여 영주가 되는 개발영주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땅을 유력 가문에 바침으로써 스스로의 권리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섭관 정치가 성행하던 시기에, 섭관 가문의 주요 수입원으로도 작용했습니다. 물론 조정에서도 이를 특정 영주의 사유지로 독점적인 지배권을 가질 수 없도록 제도를 재정비하고 있었습니다. 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사이에 성립한 체계를 장원공령제라고 합니다.
고산조 천황 재위 기간 동안, 이러한 장원들을 정리해 국고로 회수하며 무너져가던 율령제를 재정비하고, 중하류 귀족과 지방관 등을 등용하며 국정 안정을 꾀하게 됩니다. 고산조 천황의 아들인 白河天皇 시라카와 천황도 상황의 뒤를 이어 적극적인 정치를 펼쳤습니다.
12세기 중반에 들어 鳥羽天皇 도바 천황이 사망하자, 황실과 섭권 가문을 둘러 싼 전쟁이 일어났고, 이는 군사 충돌로까지 이어졌습니다. 1156년과 1160년의 두 번의 전쟁을 통해 무사 계급의 정치적 지위가 급상승하게 됩니다. 헤이안 시대 들어서는 무력 충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는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무척이나 큰 충격을 주게 됩니다. 두 전쟁에서 크게 공헌한 平清盛 다이라노키요모리가 이례적인 출세를 이루어, 後白河 고시라카와 상황의 원정을 지원하는듯 보였으나 이내 스스로 정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를 平氏政権 헤이시 정권이라고 합니다. 헤이시 정권은 지금까지 없었던 최초의 무가 정권으로써의 성격을 갖습니다.
이러한 헤이시 정권의 지배에, 귀족과 승려 계층이 크게 반발했고 뒤이어 각지의 무사, 호족층이 잇달아 군사를 일으켜 5년에 걸쳐 내란이 펼쳐지게 됩니다. 이를 治承・寿永の乱 지쇼・쥬에이의 난, 혹은 源平合戦 겐페이 합전으로 부릅니다. 이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헤이시 정권을 꺾고 源頼朝 미나모토노요리모토를 중심으로 동쪽 지방에 본거지를 둔 무가 정권, 즉 鎌倉幕府 가마쿠라 막부가 승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과 함께 헤이안 시대의 390년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헤이안 시대 전반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은 이쯤이면 되었을까요... 사실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당나라 문화에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가, 어떤 배경에서 귀족 문화가 꽃피우게 되었는가, 같은 전반적인 설명이기는 했으나... 헤이안 후기 이야기는 거의 울면서 썼어요 엉엉. 전쟁 얘기 싫어... 무가 정권 싫어...
그치만 동시에, 백인일수의 100번째 시를 읊은 준토쿠인, 그리고 그런 백인일수를 편찬한 후지와라노테이카는 저러한 어지러운 시대에 태어나 헤이안 시대 문화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입장이었을테니까... 이걸 이해하면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겠지... 하고 두 사람을 생각하며 마무리 했습니다.... (진짜로요)
아무튼, 새삼스럽지만 저도 자세한 부분까지는 모르기도 했으니, 겸사겸사 공부가 되었습니다. 야마토에 전시회에서 봤던 것도 기억이 나고요. 역시 그 전시회에 다녀오길 잘했어. 당시엔 아무것도 모르고 갔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시되어 있었으니 전체적인 개괄을 보기에 좋았던게 아닐까? 하고 이제 와서야 그런 생각을 합니다. 비슷한 전시회 또 안해주려나~~ 아무튼 앞으로 이제 이 글을 인용해서 다른 글 잔뜩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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