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の田の 仮庵の庵の 苫をあらみ わが衣手は 露にぬれつつ
あきのたの かりほのいほの とまをあらみ わがころもでは つゆにぬれつつ
- 天智天皇
[현대어 해석]
秋の田んぼのそばにある仮小屋は草を編んで作った簡素なもので目が粗いから、そこに立っていると隙間からこぼれ落ちる露で私の着物の袖が濡れてしまう。
가을날 논 한켠에 마련된 작은 임시 막사는 풀을 엮어 간소하게 만든 듬성듬성한 모양새인 탓에, 그 곳에 서 있으니 틈새로 떨어지는 밤이슬 때문에 내가 입은 옷의 소매가 젖어 들어가네.
天智天皇(天智天皇)(626~672)는 아스카 시대에 재위했던 일본의 제 38대 천황입니다. 재위 기간은 668년부터 671년으로 무척이나 짧지만, 일본 역사에서는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화를 꾀하며 본격적으로 황실의 권력을 다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약 100여년 간 덴지 천황의 자손들이 천황의 자리를 지킵니다.
이 시는 백인일수의 100개 시 중에 가장 첫번째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히라가나의 첫 번째 글자인 「あ」로 시작하기 때문에 이것을 첫 시로 선정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론 그 이유 뿐만은 아닙니다.
이 시의 내용은, 가을에 추수를 다 끝내고 난 논 한 켠에 임시로 세워진 막사에서, 조용한 전원 풍경을 바라보며 밤 이슬을 맞고 있는 화자의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아마 화자는 일년의 농사가 다 마무리 되었구나, 하는 시원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마음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시를 노래하기엔, 천황이라는 지위와 화자가 노래하는 상황이 어딘가 맞물리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이 시는 사실, 실제로는 덴지 천황이 읊은 시가 아니라는 것이 이미 정설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万葉集(まんようしゅう) 만엽집에, 이것과 무척이나 비슷한 시가 실려 있거든요.
秋田刈る 仮廬(かりほ)を作り 我が居れば 衣手寒く 露そ置きにける / 万葉集 제 14, 가을의 잡가
가을 논에 추수를 위한 작은 막사를 만들어 놓고, 내가 거기 있으면 소매가 싸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이슬이 맺혀 있다, 라는 의미입니다. 앞의 시와 거의 같죠. 만엽집에 실린 이 시는 '작자 미상' 이라고 소개 되고 있습니다. 백인일수의 가인들이 주로 천황이나 귀족 신분이었던것에 비해, 만엽집에 등장하는 시들은 도읍과 멀리 떨어진 지방에 사는 이름 모를 평민들의 시도 많이 실려 있었거든요.
후지와라노테이카가 이 시가 실제 덴지 천황의 시가 아니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을 것 같지만・・・, 당시 사회의 기반에 농사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실제 천황이 읊은 시가 아니더라도 농민들을 위해 헌사하는 의미를 담아 첫번째 시를 고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건 앞의 시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지만, 제가 재미있으니까 덧붙이는 이야기. 田라는 글자는 한국에서는 '밭 전'으로 읽힙니다. 그래서 저도 그만 습관적으로 앞의 시에 대한 해석에 '밭'으로 적었는데요, 그러고나자 벼를 추수하고 난 상황과 어딘가 어긋나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라? 싶어서 다시 생각해보니 일본어에는 '밭'을 의미하는 畑(はたけ)라는 글자가 따로 있는 것이었죠. 그리고 火+田 불과 밭(논?)을 합친 글자인 만큼, 화전이 주를 이루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어에서 田는, 벼를 기르는 '논'을 가리키는 단어라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되었고요. 한국에서는 여전히 田는 밭인데, 그럼 논은 뭐지? 하고 찾아보니 畓(답) 이라는 글자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대신 이는, 한국에서 만들어진 글자로 한국에서만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보이는대로 水+田 물과 밭을 합쳐 '논'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재미있어요... 일본에서는 논을 베이스로 불을 더해 밭을 만들고, 한국에서는 밭을 베이스로 물을 더해 논을 만든다니... 참고로 중국에서도 논은 水田이라고 쓰거나 田 한 글자만으로 표현한다고 합니다? 만 제가 잘 모르니 일단 그냥 그렇구나, 정도로.
그럼 이렇듯 비슷한 문화권에서 디테일한 의미 차이가 왜 등장하게 되었느냐,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죠. 그리고 그 질문이 향하는 곳은 당연히 '한국에서는 논 농사가 밭 농사보다 늦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한반도에서 벼농사는 비교적 최근에 비중이 높아졌고 전통적으로 더 널리 퍼져 있던 것은 잡곡 농사라고 합니다. 좁쌀, 피, 수수 등을 재배하는 밭농사였던거죠. 논 농사가 중심이 되는 것은 조선시대 중기, 즉 17세기 경에 이르러서입니다. 앞의 시가 아마 덴지 천황이 있던 아스카 시대, 늦어도 헤이안 초기 (7세기 후반에서부터 8세기 후반) 사이에 지어진 시라고 생각해보면 차이가 더욱 또렷하게 나타납니다.
역시 저는 이렇듯이, 언어 사이에 숨은 문화와 그 변화들을 들여다보는걸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특히나 한국과 일본은, 비슷한듯 다른 부분이 있어 비교해서 차이를 발견하기에 더욱 용이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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