枕草子 마쿠라노소시 제3단. 正月一日は、정월 초하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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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단. 正月一日は、정월 초하루는,
第三段。 正月一日は、増いて、空の気色、うらうらと、めづらしく、霞み込めたるに、世に有りと有る人は、姿・かたち、心ことにつくろひ、君をも、我が身をも、祝ひなどしたる様、殊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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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에서 清少納言 세이쇼나곤이 적어내려 간 정월 초하루, 그리고 이어지는 궁궐 내 모습들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총 몇 편의 글이 나올진 모르겠지만 그 첫번째 글입니다.
1월 1일, 정월 초하루에 대한 설명은 자세한 궁궐 내 행사에 대한 묘사보다는 날씨가 좋고 모두들 들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기분이 좋았다며 산뜻하게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설날을 맞이하면 새 옷을 지어 설빔을 입듯이, 비슷하게 몸을 단정히 가꾸고 깨끗한 옷을 입고서 서로 신년 인사를 나누는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죠?
이어지는 1월 7일에 대한 글은, 눈 사이로 푸릇하게 얼굴을 내민 봄나물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현대 일본에도 비슷한 것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1월 7일(양력)에는 일곱가지 나물이 들어간 죽 七草粥(ななくさがゆ)를 먹습니다. 새로운 한해도 무탈하고 건강하길 기원하는 의미입니다. 아직 헤이안 시대 당시에는 죽을 먹는 풍습으로 이어지기 전으로, 겨울을 이겨내고 싹튼 나물을 따는 若菜摘み가 이 날의 풍습으로 자리잡아 있었습니다. 그러한 풍경을 묘사한 것이 이 문장입니다.
이어지는 같은 날의 풍경은, 궁중 행사인 白馬節会(あおうまのせちえ)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천황이 직접 豊楽院(ぶらくいん)에 행차하여 사악한 기운을 해치운다고 전해지는 백마를 모아 신하들과 함께 연회를 여는 행사였습니다. 이후에는 豊楽院(ぶらくいん)이 아닌 내리内裏에 있는 紫宸殿(ししんでん)으로 옮겨 행사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이 행사는 여전히 교토시 기타쿠에 있는 가미가모 신사(上賀茂神社) 등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쇼나곤이 아직 궁궐에 들어오기 전에 이 행사를 구경하러 갔을 때에 牛車 우차를 타고 갔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야생마를 포함한 말 수가 적어 신성시 되고, 권력자들의 권력의 상징으로 활용 되었습니다. 바로 이 날의 白馬節会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에 반해 소는 비교적 많았죠.
平安京 헤이안 쿄와 그 주변 지역은 도로가 비교적 정비되어 있어, 상황을 비롯해 殿上人(てんじょうびと)나 그 자식들, 따르는 여종들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교통수단으로써 우차牛車를 이용했다고 합니다. 이는 명칭에서 보이듯이 말 대신 소가 끄는 차입니다.
(무라사키시키부 일기 두루마리 그림 제3단)
일반적으로, 4명에서 6명 정도가 동시에 탈 수 있는데 신분의 고하에 따라 좌석의 순서가 정해졌다고 합니다. 세이쇼나곤이 탄 우차에는, 아마 본인과 여종들이 함께 타고 있었을까요?
이 우차가 여러대 늘어선 것이 당시 헤이안 쿄에서 볼수 있는 일종의 명물과도 같았다고 합니다. 이 우차 자체도 신분에 따라 형태를 달리 했는데요. 소설 겐지모노가타리 속에서도, 겐지 본인의 신분을 숨기려고 다른 사람의 우차를 대신 타고 외출하는 장면 등이 흔하게 등장합니다.
한편, 待賢門(たいけんもん)은 헤이안 쿄 대내리(大内裏)의 외곽을 감싸는 12개 문 중 하나를 일컫습니다. 左衛門府(さえもんふ)가 이 곳의 경비업무를 담당했습니다. 대내리(大内裏/だいだいり)란, 헤이안 쿄의 궁궐을 가리킵니다. 그 중에서도 内裏(だいり)라고 하면, 천황이 생활하는 거처인 어전과 후궁들의 생활 공간을 말합니다. 왼쪽 그림의 전체가 대내리大内裏, 중앙 오른쪽의 파란색 네모칸이 내리内裏 지역입니다. 대내리는 헤이안 쿄의 북쪽에 위치해 정남향 방향으로 朱雀門 주작문을 두고, 북쪽으로는 一条 이치조 대로, 남쪽으로는 二条 이조 대로, 동쪽으로는 동 大宮 오오미야 대로, 서쪽으로는 서 大宮 오오미야 대로, 각 네 개의 대로로 구획지어집니다.
한편 1월 7일의 白馬節会는 豊楽院(ぶらくいん)에서 개최되었다고 합니다. 왼쪽 그림의 가장 왼쪽 아래편 파란색 네모 공간입니다. 이는 황제가 기거하는 내리와는 별도로 지어진 곳으로, 연회를 위해 마련 된 공간이었습니다. 800년 경에 건축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정의 활동 영역이 내리内裏를 중심으로 옮겨가게 되자, 점차 이용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미 9세기 후반 이후에는 이곳에서 열렸던 여러 연회들이 내리内裏에 있는 紫宸殿(ししんでん)으로 옮겨져 개최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마 세이쇼나곤이 보러 갔던 행사 또한, 豊楽院이 아니라 紫宸殿에서 개최 되었던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待賢門(たいけんもん)을 통해 궁궐에 들어갔겠죠? 위에서 소개한 白馬節会 그림 또한 紫宸殿을 배경으로 그려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紫宸殿은, 남쪽을 향해 동쪽에는 벚꽃나무를 서쪽에는 귤나무를 심어두었다고 합니다. 여전히 그 모습을 볼 수 있죠.
이는 왼쪽부터 豊楽院(ぶらくいん), 朝堂院(ちょうどういん)(지도 내에선 八省院はっしょういん으로 표기), 内裏(だいり)(지도 내에선 禁裏きんり로 표기)를 자세히 그려놓은 지도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紫宸殿에서 열리는 白馬節会 연회를 보고자 세이쇼나곤은 우차를 타고 궁궐로 향합니다. 그 때에 통과한 것이 待賢門(たいけんもん)이죠. 이 문은 현재에는 남아있지 않는데, 크기는 5칸, 문이 3칸 이었다고 전해집니다. 1칸 一間는 일본 고유의 단위로, 건물이나 도로 폭을 나타낼때 활용되었는데요. 현재의 단위로 환산하면 약 1.8m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오른쪽 사진은 헤이안 시대 이전에 나라에 있던 平城京(へいじょうきょう)의 待賢門(たいけんもん)을 복원해 둔 곳입니다. 아마 문의 크기는 비슷했거나 이보다 더 컸으리라고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당시 궁궐의 구조를 생각해보면 어떤 식으로 그 곳을 이동하고 어떤 건물들을 보고 생활했는지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상상되는 것 같지 않나요? 특히 이 헤이안 궁궐과 그 주변 도성의 모습은 당나라의 장안성의 구조를 빌려와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천황이 생활하는곳은 모두 정남향을 향하고 있고, 그 주변을 둘러 싼 도시들은 정확히 남쪽에서 북쪽을, 혹은 동쪽에서 서쪽을 가르고 있죠. 마치 현대적인 계획도시 같은 형태가 아닌가요. 사실 여기서도 엿볼 수 있듯이, 헤이안 시대 문화의 대부분은 중국 당나라 문화에서 그 뿌리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조만간 따로 글을 써봐야겠는데 말입니다... (이하생략)
휴, 1월 7일에 대한 이야기만 하더라도 아직 左衛門の陣과 殿上人와 舎人와 さし櫛와 主殿司, 女官, 女房, 九重の宮中, 白粉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끝나질 않네요... 궁궐 구조에 대한 이야기는 대략 마무리 된 것 같으니 일단 첫번째 글은 여기서 마무리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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