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꽃입니다. 사실, 여름내도록 피어 있는 배롱나무 꽃을 꽤나 좋아해요. 지금 사는 동네 근처에 유난히 배롱나무가 많기도 하고요. 그래서 사진 폴더를 정리하다가 배롱나무 꽃을 찍어뒀던 사진을 발견하고선, 문득 이 꽃을 읊은 노래가 없나 하는 궁금증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배롱나무는, 백일홍이라고도 불립니다. 국화과 꽃인 초본 백일홍과 같은 이름이죠. 초여름에 꽃이 피기 시작하여 가을까지, 약 100일 간 피어있다고 하여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百日紅, 일본에서도 같은 한자를 쓰고 サルスベリ 라고 읽습니다. 猿・滑り, 즉 원숭이가 미끄러진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이 명칭은 나무의 외피가 원숭이가 미끄러질 정도로 매끈하다는 뜻에서 붙게 되었다고 합니다. 꽃을 보는데에 정신이 팔려서 나무의 외피까지는 들여다 본 적이 없었는데, 올 여름에 배롱나무 꽃이 피면 나무도 한번 자세히 관찰해봐야겠어요.
중국에서는 당나라 장안의 황궁 안에서 잔뜩 심어 그 아름다움을 즐겼다고 합니다. 일본에는 그보다는 약간 늦게, 가마쿠라 시대(12~13세기) 때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헤이안 시대 당시에는 백일홍을 소재로 한 노래는 만들어지지 않은 것 같아요. 그나마 가까운 시대로는, 가마쿠라 시대 1310년에 편찬된 夫木和歌抄(ふぼくわかしょう) 라는 가집에, 藤原為家 후지와라노 다메이에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다메이에는, 오구라 백인일수의 편찬자로 유명한 후지와라노 테이카의 삼남이라고 합니다. 이 정도면 포스팅 할만 하지, 하는 안도감(?)을 얻었으므로 소개해봅니다.
あしひきの 山のかけぢの さるなめり すべらかにても 世をわたらばや
あしひきの やまのかけぢに さるなめり すべらかにても よをわたらばや
- 藤原為家
발길을 이끄는 산기슭의 험한 절벽에 솟아난 배롱나무, 그처럼 미끄러지듯이 이 세상도 살아갈 수 있다면, 하는 의미입니다.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보다는 배롱나무의 매끈한 모습을 보고 읊은 시였네요. 그는 가마쿠라 시대가 시작된 이후였던 1198년에 태어나 가마쿠라 중기를 살아갔던 정치가이자 가인이었습니다. 테이카의 아들로 자라났다면, 아버지의 영향을 꽤나 강하게 받았을 것으로 쉽게 예상이 됩니다. 실제로 이처럼 수많은 시를 남기기도 했으니까요.
시의 첫 구절인 'あしひきの(あしびきの)'는, '산'을 수식하는 枕詞 마쿠라코토바입니다. 앞에서는 足引の, 로 해석했지만 사실 정확한 의미는 전해지지 않고 있고 그 해석법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백인일수 중에도 이 마쿠라코토바를 사용한 시가 있죠. (3번)
실제로 배롱나무는, 중국을 원산지로 하기 때문에 일본에 유래한 이후에도 산지 등에 자연적으로 서식하지는 않고, 정원 등에 관상용으로 심어 기르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현재에도 이러한데, 가마쿠라 시대 당시에는 더욱 더 그랬겠죠? 여전히 가마쿠라에 있는 절에는 여름이면 배롱나무 꽃이 아름답게 그 붉은 색을 자랑하는 명소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러한 배롱나무를, 다메이에는 '산기슭의 험한 절벽'에 있다고 묘사합니다.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그 나무의 매끈함처럼 나도 이 세상을 매끄럽게 넘어가고 싶다, 하는 소망을 담고 있죠. 그렇게 생각해보면, 사실 '험난한 산기슭'에 있는 것은 배롱나무가 아니라 본인의 처지를 비유한 말이 아니었을까요? 격변하는 시대에 태어나, 지난 시대를 잊지 말아야 하는 역사적 역할을 짊어지고, 동시에 지금 이 시대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괴로움을 노래한 시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다메이에는 아버지 테이카를 뛰어 넘는 곤다이나곤의 관직까지 올라갔다고 해요. 이쪽 저쪽으로 고민하고 흔들리며, 나름대로 잘 헤쳐나간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 다시 올해 여름이 와서 배롱나무 꽃이 피어나면, 그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것과 동시에 매끈한 나무 외피의 결을 보고 다메이에가 고민하며 읊었던 이 노래가 떠오를 것 같네요.
+) 백인일수는 늘 설명 자료가 많아서 떠먹여주는 수준이고 그걸 취사선택 해서 포스팅하고 있지만, 이건 어디에도 현대어 해석 조차 없었던걸 온갖 자료를 찾고 배경 지식을 활용해가며 이 정도로 읽어 낼 수 있게 된 건 스스로 생각해도 뿌듯합니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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